[작성자:] 제이 허드슨

  • 밥 — 첫 번째 변화

    지난 편에서 비만에 가장 직접 영향을 미치는 두 가지가 밥과 몸이라고 했습니다. 그중 밥부터 보겠습니다.

    밥은 음식입니다

    밥은 우리가 먹는 음식입니다. 매일 세 번씩 먹기 때문에 건강에 미치는 영향이 큽니다. 게다가 음식은 오랜 기간 형성된 식습관에 큰 영향을 받습니다. 그래서 식습관에 의도적으로 개입해 보면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우선 우리가 먹는 음식이 어떻게 이뤄져 있는지부터 기본적으로 이해해 봅시다.

    한 가지 앞으로 꼭 기억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음식은 정답지가 없습니다. 나에게 맞춰, 조금씩 개선해 가며, 조금 더 나은 식단을 꾸리는 과정이라는 사실입니다.

    영양소, 두 가지로 나눠보기

    음식에 든 영양소는 크게 둘로 나뉩니다. 양이 많이 필요한 다량영양소(매크로, macronutrient)와 양은 적어도 되지만 없으면 안 되는 미량영양소(마이크로, micronutrient)입니다.

    세부 설명에 들어가기 전에, 전체 그림부터 보겠습니다.

    영양소
    │
    ├─ 다량영양소 (매크로) — 에너지를 만들고 몸을 구성함
    │    ├─ 탄수화물 — 가장 빠른 에너지원
    │    ├─ 단백질   — 조직을 만들고 고침
    │    └─ 지방     — 가장 오래 쓰이는 에너지원
    │
    └─ 미량영양소 (마이크로) — 대사가 돌아가도록 돕는 조력자
         ├─ 비타민
         │    ├─ 지용성 (A·D·E·K)
         │    └─ 수용성 (B군·C)
         └─ 무기질(미네랄)
              ├─ 많이 필요: 칼슘·인·칼륨·나트륨·마그네슘
              └─ 적게 필요: 철·아연·요오드 등
    구분 종류 하는 일
    다량영양소 (매크로)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 에너지를 만들고 몸을 구성함
    미량영양소 (마이크로) 비타민, 무기질(미네랄) 대사가 돌아가도록 돕는 조력자

    다량영양소가 하는 일

    탄수화물은 가장 빨리 쓸 수 있는 에너지원입니다. 단순당(설탕처럼 분자가 작은 것)은 빨리 흡수되고, 복합 탄수화물(현미·통밀처럼 분자가 큰 것)은 천천히 흡수됩니다. 남는 것은 글리코겐이라는 형태로 저장해 둡니다.

    단백질은 아미노산이 여러 개 연결된 물질입니다. 에너지로도 쓰이지만 더 중요한 역할은 몸을 이루는 조직을 만들고 고치는 것입니다. 호르몬과 효소도 단백질로 만들어집니다.

    지방은 가장 천천히 쓰이는 대신 같은 무게에서 가장 많은 에너지를 냅니다. 호르몬을 만드는 재료가 되고, 비타민 A·D·E·K(지용성 비타민)는 지방이 있어야 몸에 흡수됩니다.

    대략적인 하루 비율은 탄수화물 50–55%, 단백질 10–15%, 지방 20–35%(이 중 포화지방은 10% 미만) 정도로 봅니다. 정확한 숫자보다 세 가지가 다 필요하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런데 내가 지금 먹고 있는 음식이 위의 셋 중에 어디에 포함되는지 헷갈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럴 때는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운영하는 식품영양성분 데이터베이스에서 음식 이름으로 검색해 보세요. 100g당 탄수화물·단백질·지방·비타민·미네랄 함량이 다 나옵니다.

    미량영양소가 하는 일

    비타민은 지용성(A·D·E·K — 지방과 함께 흡수)과 수용성(B군·C — 물에 녹고 남으면 소변으로 빠져나감)으로 나뉩니다. 무기질(미네랄)은 몸에 비교적 많이 필요한 것(칼슘, 인, 칼륨, 나트륨, 마그네슘)과 아주 적게 필요한 것(철, 아연, 요오드 등)으로 나뉩니다.

    양은 적지만 대사(음식을 에너지로 바꾸는 과정 전체)가 돌아가려면 이 조력자들이 있어야 합니다. 다량영양소만 채우고 미량영양소가 부족하면 엔진은 있는데 점화 장치가 없는 셈입니다.

    미량영양소는 나중에 더 자세히 다룰 예정입니다. 지금은 비타민이 지용성과 수용성으로 나뉘고, 그 밖에 무기질이 있다는 정도만 이해해도 됩니다.

    접시로 재보기 — Healthy Eating Plate

    한 끼 건강식 — 하버드 보건대학원 Healthy Eating Plate 한국어판
    출처: 한 끼 건강식 — The Nutrition Source, Harvard T.H. Chan School of Public Health

    지금까지가 재료였다면, 이제 어떻게 담을지가 남았습니다. 하버드 보건대학원(Harvard T.H. Chan School of Public Health)이 만든 Healthy Eating Plate를 씁니다. 가장 직관적이기 때문에 편리할 뿐더러 오늘부터 즉시 측정 가능한 방법이라 추천합니다.

    • 접시의 절반: 채소와 과일 (감자·감자튀김은 제외)
    • 4분의 1: 통곡물 (현미, 통밀빵 등 — 흰쌀·흰빵 같은 정제곡물은 줄임)
    • 4분의 1: 단백질 (생선, 가금류, 콩류, 견과류 — 붉은 고기·가공육은 줄임)
    • 소량의 건강한 기름 (올리브유 등)
    • 물, 차, 무가당 커피 위주로 마시기

    미국 정부의 마이플레이트(MyPlate)와 각도가 다릅니다. 하버드 쪽은 탄수화물의 질(정제곡물인지 통곡물인지)을 더 따지고, 건강한 지방은 따로 제한하지 않습니다.

    이 접시가 이 글에서 하는 역할은 식단표가 아니라 측정 도구입니다. 접시를 나누는 순간, 오늘 먹은 것이 어느 쪽으로 치우쳤는지 눈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실천 — 그릇을 준비하고 사진으로 남기기

    방법은 간단합니다.

    1. 평소 쓰는 그릇 하나를 정합니다.
    2. 위 비율대로 나눈다고 생각하고 음식을 담습니다. 자로 잴 필요는 없습니다. 눈대중으로 절반·4분의 1·4분의 1이면 충분합니다.
    3. 먹기 전에 사진을 한 장 찍습니다.

    사진 한 장이 오늘의 기록입니다. 지난 편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날짜가 같이 남아야 나중에 비교가 됩니다. 매 끼니가 아니어도 됩니다. 하루 한 끼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브로콜리, 토마토, 아보카도, 구운 연어를 담은 그릇
    실제로 최근에 먹은 저녁입니다. 브로콜리·토마토(채소, 절반), 아보카도(건강한 지방), 구운 연어(단백질)를 한 그릇에 담았습니다.

    처음에는 접시를 나누는 선을 눈으로 그어가며 담았습니다. 한동안 이렇게 하다 보니 이제는 자를 대거나 계산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릇에 채소를 절반쯤 깔고, 그 위에 단백질과 지방을 얹으면 대략 맞습니다. 눈대중이 손에 붙은 겁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런 식으로 먹게 됩니다. 정제곡물(흰쌀·흰빵)은 안 보이고, 채소가 그릇의 절반을 채우고, 단백질과 건강한 지방이 나머지를 채웁니다. 규칙을 지키려고 애쓴 게 아니라, 그릇을 채우다 보니 이 모양이 됐습니다.

    양은 지금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평소 식사량이면 됩니다. 그보다는 비율을 맞추는데 집중해보세요.

    오늘부터 바로 시작해보세요.

    Takeaway

    • 영양소는 다량(탄수화물·단백질·지방)과 미량(비타민·미네랄)으로 나뉩니다.
    • 다량은 에너지와 몸의 재료, 미량은 대사를 돌리는 조력자입니다.
    • 접시를 절반(채소·과일) : 4분의 1(통곡물) : 4분의 1(단백질)로 나눠 담으면 그 자체가 측정 도구가 됩니다.
    • 그릇 하나 정하고, 담고, 사진 한 장 — 오늘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출처

  • 비만 — 첫 번째 대상

    비만부터 시작합니다.

    비만이라고 하면 뚱뚱한 사람이 먼저 떠오릅니다. 그런데 정확히 보면 체중이 아니라 체지방이 문제입니다. 몸무게가 같아도 근육이 많은 사람과 지방이 많은 사람은 건강 상태가 다릅니다. 체지방이란 몸에 저장된 지방의 양이고, 이것이 필요 이상으로 쌓인 상태가 비만입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신경 써야 할 것은 복부의 내장지방입니다. 배 안쪽, 장기 사이사이에 쌓이는 지방인데, 뒤에서 보시겠지만 이 지방이 하는 일이 따로 있습니다.

    원인은 단순합니다. 밥(들어오는 에너지)이 몸(움직여서 쓰는 에너지)보다 많은 날이 쌓이면 비만이 됩니다. 여기에 잠이 부족하거나 스트레스가 많거나 유전적으로 취약하면 같은 양을 먹어도 더 쉽게 쌓입니다. 원인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 겹칩니다.

    나이가 들면서 뱃살 고민을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체중은 그대로인데 뱃살만 늘고, 활력은 떨어지는데 이유를 모르는 경우가 흔합니다. 그래서 비만은 가장 먼저 체크해야 할 지표입니다. 측정도 간편하고, 몸 전체 상태를 한 번에 들여다볼 수 있는 항목이기도 합니다.

    무엇으로 잴까 — 줄자와 체중계

    측정에는 두 가지면 충분합니다. 줄자(키와 허리둘레를 잽니다)와 체중계(체중을 잽니다). 둘 다 오늘 집에 없어도 살 수 있고, 부담되는 가격도 아닙니다.

    이 둘로 체질량지수(BMI)를 계산합니다.

    BMI = 체중(kg) ÷ 신장(m) ÷ 신장(m)

    분류 BMI
    저체중 18.5 미만
    정상 18.5–22.9
    비만 전 단계 23–24.9
    1단계 비만 25–29.9
    2단계 비만 30–34.9
    3단계 비만 35 이상

    측정하셨으면 기록해 두세요. 날짜를 반드시 같이 적어야 합니다. 오늘의 숫자 하나는 의미가 없습니다. 지난 편에서 말씀드린 대로, 다음 값과 비교할 수 있어야 기준선이 됩니다.

    비만이 만드는 병 — 하나의 기전

    내장지방은 그냥 쌓여 있는 살이 아닙니다. 호르몬을 내보내는 장기처럼 움직입니다.

    지방세포는 렙틴이라는 물질(식욕을 억제하는 호르몬)을 분비합니다. 원래 역할은 뇌에 "에너지가 충분하니 그만 먹어도 된다"고 알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장지방이 늘어난 사람은 이 물질의 혈중 농도가 오히려 높은데도 뇌가 신호를 못 알아듣는 상태가 됩니다. 이것을 렙틴 저항성이라고 부릅니다. 음량을 아무리 높여도 대화가 안 들리는 상황과 비슷합니다. 몸이 말을 하는데 못 알아듣는다는 점에서, 지난 편에서 다룬 이야기와 결이 같습니다. 다만 이번엔 서랍 속 결과지가 아니라 몸 안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여기에 더해 내장지방은 염증을 일으키는 물질(염증성 사이토카인)을 과다하게 내보냅니다. 이 염증이 혈관에 염증을 일으켜 혈압을 올리고, 근육과 간이 인슐린에 반응하는 능력을 떨어뜨립니다(인슐린 저항성). 인슐린이 제 역할을 못 하면 혈당이 오릅니다.

    이 하나의 사슬 — 렙틴 저항성, 염증, 인슐린 저항성 — 에서 여러 병이 갈라져 나옵니다.

    질환 비만과의 연결
    고혈압 혈관 염증, 나트륨이 몸에 다시 흡수되는 양 증가
    이상지질혈증 중성지방 상승, 좋은 콜레스테롤(HDL) 저하
    당뇨병 인슐린 저항성 — 이 시리즈 4대 질환 중 비만과 가장 직접 연결
    지방간 간에 지방이 쌓이고 심하면 염증으로 진행
    심혈관질환 혈관이 좁아지고 굳는 변화(동맥경화) 진행
    수면무호흡증 기도 주변에 지방이 쌓여 기도가 좁아짐
    퇴행성 관절염 관절이 버텨야 하는 무게 증가
    일부 암 만성 염증과 호르몬 변화가 배경으로 지목됨 (인과관계 단정은 아님)

    이 시리즈가 다루는 넷(비만·고혈압·이상지질혈증·당뇨) 중 셋이 이 표 위쪽에 있습니다. 비만을 가장 먼저 다루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나머지 셋을 만드는 공통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허리둘레가 따로 중요한 이유

    체중계와 줄자로 키·체중을 재면 BMI가 나옵니다. 그런데 BMI만으로는 지방이 어디에 있는지 모릅니다. 같은 BMI라도 지방이 팔다리에 있는 사람과 배 안쪽(내장지방)에 있는 사람은 위 표의 병들이 생길 위험이 다릅니다. 바로 위에서 본 것처럼, 병을 만드는 것은 지방의 양이 아니라 내장지방이 내보내는 신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허리둘레를 따로 잽니다. 대한비만학회 기준으로 남성은 90cm 이상, 여성은 85cm 이상이면 복부비만입니다. BMI가 정상이어도 허리둘레가 이 기준을 넘으면 안심할 수 없습니다.

    다만 이 기준도 완벽하지 않습니다. 키가 아주 크거나 작은 사람에게는 절대 수치 하나로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허리둘레를 키로 나눈 값(WHtR, Waist-to-Height Ratio)을 함께 봅니다. 계산은 간단하고 기준은 하나입니다. 0.5 미만이면 정상, 즉 허리둘레가 키의 절반을 넘지 않아야 합니다.

    다섯 가지 변화 중 무엇이 비만을 움직이나

    밥, 잠, 몸, 쉼, 곁 — 다섯 다 무관하지 않지만 근거의 힘은 다릅니다.

    밥과 몸이 가장 직접적입니다. 들어오는 에너지(밥)와 나가는 에너지(몸)의 차이가 비만의 정의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잠과 쉼은 간접적이지만 기전이 뚜렷합니다. 잠이 부족하면 식욕을 억제하는 호르몬(렙틴)은 줄고 식욕을 끌어올리는 호르몬(그렐린)은 늘어납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나오는 호르몬(코르티솔)은 내장지방이 쌓이는 것을 촉진합니다. 둘 다 위에서 본 렙틴 저항성과 맞물립니다.

    곁은 가장 간접적입니다. 정서적으로 먹는 습관이나 주변 관계가 체중 관리를 오래 지속하는 데 영향을 준다는 보고는 있지만, 앞의 넷만큼 기전이 분명히 밝혀져 있지는 않습니다.

    다 똑같이 중요하다고 뭉뚱그리지 않겠습니다. 시작은 밥과 몸에서 하고, 잠과 쉼을 다음으로, 곁은 그다음으로 보는 것이 근거에 맞는 순서입니다.

    우리는 다른 나라에 여행을 갈 때 몇 가지 표현을 배워 갑니다. 몸의 언어도 비슷합니다. 오늘 나온 용어들이 낯설어도, 하나씩 익히다 보면 어느새 몸이 하는 말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Takeaway

    오늘 내용에서 꼭 기억할 것만 남깁니다.

    • 비만은 체중이 아니라 체지방, 그중에서도 내장지방이 문제입니다.
    • 오늘 줄자와 체중계로 BMI와 허리둘레를 재고, 날짜와 함께 기록하세요.
    • 복부비만 기준은 남성 90cm, 여성 85cm입니다. 키를 반영하려면 허리둘레÷키(WHtR)가 0.5 미만인지도 함께 봅니다.
    • 내장지방이 신호를 잘못 보내는 상태(렙틴 저항성)에서 염증과 인슐린 저항성이 이어지고, 여기서 고혈압·이상지질혈증·당뇨가 갈라져 나옵니다.
    • 다섯 가지 변화 중 비만에는 밥과 몸이 가장 직접적입니다.

    출처

  • 몸이 하는 말을 처음 들었습니다

    서랍을 열었습니다. 그다음이 문제였습니다.

    지난 글을 올리고 나서 제가 저에게 물은 게 있습니다. 십 년 동안 검진을 받았다면서요. 그것도 측정 아닌가요. 지금부터 하겠다는 것과 뭐가 다른가요.

    답을 못 하면 지난 글은 그냥 반성문입니다.

    몸이 하는 말

    몸은 계속 말을 걸어옵니다. 다만 우리가 아는 언어가 아닙니다.

    어젯밤 잠을 제대로 못 잔 날, 아침에 심박수를 재보면 평소보다 높습니다. 스트레스가 많았던 주에는 공복혈당이 올라와 있습니다. 체중은 그대로인데 허리둘레만 조금씩 줄어드는 날들이 몇 주 이어지면, 근육이 늘고 지방이 줄었다는 뜻입니다. 몸은 이렇게 말합니다. 놓치기 딱 좋은 신호들로 말입니다. 들어도 못 알아들었던 겁니다.

    지난 글에서 제가 결과지를 「제가 읽을 수 없는 언어」라고 부른 것도 같은 얘기였습니다.

    몇 년 전만 해도 이 언어를 번역받으려면 병원에 가야 했습니다. 1년에 한 번, 그마저도 거르기 일쑤였습니다. 지금은 다릅니다. 손목의 시계 하나, 반지 하나가 매일 매시간 그 신호를 받아 적습니다. 그러고는 제가 알아들을 수 있는 숫자로 바꿔서 보여줍니다. 이것이 Quantified Self라는 기술의 가장 간단한 정의입니다. 자기 몸을 수치로 번역한다는 뜻입니다.

    제 몸이 하는 말을, 제가 드디어 들을 수 있게 된 겁니다.

    물론 배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지난 글에서 결과지를 한 줄씩 옮겨 적어 ChatGPT에 물었던 그 밤을 기억하실 겁니다. 그때 저에게 필요했던 것도 번역이었습니다. 지금 하려는 일은 그 번역을 1년에 한 번이 아니라 매일, 몸에 붙여서 받는 것뿐입니다.

    이번 글부터 몇 편에 걸쳐 하려는 일은 이렇습니다.

    한국인에게 가장 흔한 질환 넷에 집중합니다. 비만, 고혈압, 이상지질혈증, 당뇨입니다. 넷 다 다른 이름이지만 생활습관으로 충분히 완화할 수 있고, 많은 경우 정상으로 되돌릴 수 있습니다.

    그다음 다섯 가지를 하나씩 바꿔봅니다. 밥, 잠, 몸, 쉼, 곁입니다.

    밥은 언제, 어떻게, 무엇을 먹는지입니다. 잠은 밥만큼, 어쩌면 밥보다 중요한 습관입니다. 몸은 얼마나 움직이는가, 쉼은 스트레스를 어떻게 내려놓는가입니다. 곁은 정서, 그러니까 사람과의 관계를 말합니다. 다섯 다 일상에서 매일 반복되는 행동입니다.

    다섯 모두 중요하지만 사람마다 약한 곳이 다릅니다. 베개에 머리만 대도 바로 잠드는 사람이 있고, 몇 년째 불면증인 사람도 있습니다. 본인에게 부족한 한 곳부터 손대면 됩니다.

    일상의 습관을 바꾸고 나면 숫자로 확인합니다. 넷이 어떻게 움직였는지 봅니다.

    이 과정은 이렇게 흐릅니다.

    [대상]  비만·고혈압·이상지질혈증·당뇨
       ↓ 무엇을 바꿀지 정한다
    [변화]  밥·잠·몸·쉼·곁
       ↓ 숫자로 확인한다
    [확인]  바뀌었나, 안 바뀌었나

    앞으로 쓸 글들은 모두 이 틀을 따릅니다. 머리에 이것만 넣어두면, 복잡해 보이는 건강 관리도 단순해집니다.

    예전에도 재고 있었는데, 뭐가 다른가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십 년을 측정했는데 관리를 못 한 이유가 무엇인가. 셋이 있습니다.

    한 점이냐, 기준선이냐. 건강검진은 1년에 한 점입니다. 한 점만으로는 비교할 것이 없어서 해석이 안 됩니다. 기준선은 다릅니다. 무언가를 바꾸기 직전에 재는 점이고, 그 뒤로 나오는 모든 값은 이 점과 비교됩니다. 비교 상대가 생겨야 측정이 관리로 바뀝니다.

    남의 정상 범위냐, 제 정상 범위냐. 결과지에 나오는 참고 범위는 인구 집단 기준입니다. 범위 안에만 있으면 괜찮은 것이 아닙니다. 제 기준선에서 계속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면 그건 신호입니다. 지난 글에서 이미 이 장면을 봤습니다. 「몇 년치를 날짜 순으로 늘어놓으니 같은 항목이 계속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 그때는 왜 이것이 중요한지 몰랐습니다.

    그냥 재느냐, 무엇을 바꿀지 정해두고 재느냐.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기준선은 숫자가 아닙니다. 다음 행동과 짝지어진 숫자입니다. 짝이 없으면 재고 나서 다시 서랍에 들어갑니다. 십 년 동안 제가 한 것이 정확히 그것이었습니다.

    기준선은 무엇을 바꿀지 이미 정해둔 상태에서 재는 것입니다.

    한 번의 사이클

    대상이 정해지면 다음 질문은 이것입니다. 넷을 되돌리려면 무엇을 바꿔야 하는가.

    다섯 가지는 서로 독립적이지 않습니다. 비만과 고혈압을 보면 둘 다 밥을 바꾸면 따라갑니다. 당뇨와 고혈압은 둘 다 스트레스의 영향을 받습니다. 한 가지를 손대면 여러 곳이 움직입니다.

    한 번의 사이클은 이렇습니다. 하나의 변화를 고르고, 기간을 정하고, 숫자를 봅니다. 바뀌었으면 유지합니다. 안 바뀌었으면 다른 변화를 시도합니다. 이 과정을 반복하면서 어느 것이 내 몸을 움직이는지 알아갑니다.

    무엇으로, 얼마나 자주 재는지는 다음 글에서 하나씩 짚겠습니다.

    오늘 하실 수 있는 것

    다 한 번에 잡을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은 서랍 한 장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가장 최근 결과지를 꺼내세요. 그리고 넷(비만·고혈압·이상지질혈증·당뇨) 중에 해당하는 항목이 있는지 찾아보세요. 그것이 기준선입니다. 오늘은 동그라미만 치세요. 숫자를 바꾸려고 하지 마시고요.

    그럼 이제 몸이 하는 이야기를 들으러 가 봅시다.

  • 측정은 했는데 관리를 하지 않았습니다

    1막 — 그날

    2024년 1월, 뉴욕의 하늘은 맑았습니다. 일주일 전에 받은 혈액검사 결과를 들으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날씨와 달리 몸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얼마 전부터 기력이 달렸습니다. 무릎은 계단을 오르내릴 때 삐걱거렸고, 허리는 의자에서 일어날 때 아팠고, 목은 아침에 눈을 뜨면 뻐근했습니다. 불면증은 오래돼서 고칠 수 없는 것으로 알고 지냈습니다. 머릿속이 맑지 않으니 뭉게구름을 올려다볼 여유 같은 건 없었습니다.

    한국에서든 여기서든 의사에게 듣는 말은 늘 같았습니다. 술을 줄이세요. 운동을 하세요. 잘 챙겨 드세요. 몰라서 안 하나 싶었습니다. 지나고 보니 저는 정말로 아는 게 없었습니다.

    그날 들은 설명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어려운 용어는 늘 그렇듯 귀를 스쳐 지나갔습니다. 남은 건 종이에 빨간색으로 찍힌 항목이 지난번보다 몇 개 늘었다는 사실뿐이었습니다. 저 숫자들이 자기들끼리 짜고 제 기력을 빼가는 모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집에 오니 더 피곤했습니다. 현관을 지나고 나면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어집니다. 몇 년째 그랬습니다.

    오는 길에 조깅하는 사람들을 봤습니다. 몸이 좋은 것도 아니었고 뛰는 자세가 나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저는 웃었습니다. 금세 잊었습니다.

    강변 산책로를 달리는 사람들. 뒤로 맨해튼 스카이라인이 보입니다.
    이미지: AI로 생성한 그림입니다.

    저녁에 한국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어머니는 연세가 드셔도 자식 걱정뿐입니다. 수십 년째 당뇨를 앓고 계시고 그 병에 유전이 크게 작용한다는 걸 아시니 통화할 때마다 같은 말을 하십니다. 너는 그러지 마라. 의사가 ‘당뇨 전 단계’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아직 당뇨는 아니다. 그렇게 정리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2막 — 서랍

    제 책상 서랍에는 검사 결과지가 쌓여 있습니다. 한국에서 받은 건강검진 결과지, 미국에서 받은 혈액검사 결과지. 버리지는 않았습니다. 다시 꺼내 본 적도 없었습니다.

    기계도 하나 샀습니다. 오래전에 The Economist에서 「The Quantified Self」라는 기사를 읽고, 이것저것 재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애플워치를 샀습니다. 그러고는 데이터를 들여다보지 않았습니다. 시계는 손목에서 계속 뭔가를 재고 있었고, 저는 그걸 시계로 썼습니다.

    양쪽 병원을 다니면서 차이를 하나 느꼈습니다. 제가 다닌 한국 병원에서는 의사가 쉽게 설명해줬고 저에게 요구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미국 쪽은 반대였습니다. 진료 시간이 길고 별별 것을 꼬치꼬치 캐묻습니다. 제대로 답하지 못하는 질문이 많았습니다. 다른 환자들은 이런 걸 다 알고 오나, 나만 모르나 싶었습니다.

    요구도 많았습니다. 집에 혈압계가 있습니까. 심박계는 있습니까. 그런 기본적인 것도 없이 건강에 관심이 있다고 할 수 있느냐고 묻는 것처럼 들려서 불편했습니다. 몇 번 반복되고 나니 검진 날짜가 다가오면 그것만으로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결과지는 읽지 않았습니다. HbA1c, Bilirubin, Neutrophils, ALT, AST, MCV. 일반인은 접근할 필요도 없고 접근할 수도 없는 Lexicon, 의학 용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 몸인데 제가 읽을 수 없는 언어로 정해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이해한 것은 한 줄이었습니다. 뭔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데가 있지만 사는 데 지장은 없는 정도. 나이가 들면 어쩔 수 없는 변화겠거니 했습니다.

    시간은 그대로 흘렀습니다. 늘 피곤했지만 그러려니 했고, 그 무기력이 일상이 됐습니다.

    3막 — 어느 날

    아이 시험장에 데려다줄 일이 생겼습니다. 차로 몇 시간 거리였고 제가 운전대를 잡았습니다.

    날은 좋았습니다. 커피 한 잔에 기대어 갔고 아이가 시험을 치르는 동안 차에서 무료하게 기다렸습니다. 문제는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눈꺼풀이 천근만근이 됐습니다. 이러다 사고를 내겠구나 싶을 만큼 피로가 몰려왔습니다. 짜증이 폭발합니다. 아이에게 짜증을 부렸습니다. 도저히 운전을 이어갈 수 없어 중간에 세우고 쉬었습니다.

    집에 와서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아이에게 짜증을 낸 게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아내는 그걸 훨씬 오래전부터 받아왔습니다. 이건 뭔가 잘못됐습니다.

    노트북을 켰습니다. 서랍에 내팽개쳐 뒀던 결과지를 꺼내 검사 항목을 하나하나 옮겨 적고 ChatGPT에 넣었습니다. 이 항목이 무엇인지, 몸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정상 범위는 어디까지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결과는 생각보다 좋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제 몸 상태를 처음으로 마주한 순간이었습니다.

    몇 년치를 날짜 순으로 늘어놓으니 같은 항목이 계속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저에게는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 결과는 훨씬 오래 쌓여서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ChatGPT는 의사가 아닙니다. 추천은 해주지만 진단은 못 합니다. 그래도 제 상태를 밖에서 보게 해주는 눈은 됐습니다.

    4막 — 측정은 했는데 관리를 안 했다

    회사를 다니며 배운 것이 하나 있다면, 측정하지 않는 것은 관리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저는 측정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는 건강검진으로, 미국에서는 혈액검사로, 몇 년째 정기적으로. 손목에서는 시계가 하루도 쉬지 않았습니다. 서랍의 종이들과 그 시계가 증거입니다.

    그러니까 문제는 데이터가 없는 게 아니었습니다. 측정은 했는데 관리를 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는지 생각해 봤습니다.

    첫째, 제 건강을 의사에게 맡겨두고 있었습니다. 제 몸인데 제 몸을 설명하는 언어는 의사들의 언어였고, 저는 그걸 배운 적이 없으니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미국 의사가 집에 혈압계가 있느냐고 물었을 때, 그건 저를 나무란 게 아니었습니다. 맡기지 말라는 말이었습니다. 알아듣는 데 몇 년이 걸렸습니다.

    둘째, 귀찮았습니다. 제가 겪은 한국 의료는 빠르고 쌌습니다. 제 전문 분야도 아닌 일에 시간을 쓰는 건 바보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귀동냥으로 들은 영양제를 챙기고 집 앞 산에 몇 번 오르면 나아지겠거니 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된다고. 심각해지면 집 앞에 널린 병원 중에 제일 유명한 데를 가면 다 고쳐줄 거라고.

    그사이 어머니는 수십 년째 당뇨를 앓으셨고, 저는 십여 년째 당뇨 전 단계였습니다.

    십여 년입니다. 그날 밤 전화를 끊으며 「아직 당뇨는 아니다」라고 정리한 그 문장을, 저는 십 년 넘게 해마다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바꿔야 하는가. 그리고 저는 왜 알면서도 움직이지 않는가. 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습니다. 측정하는 일과 관리하는 일 사이에 제가 한 번도 열어본 적 없는 문이 하나 있다는 걸, 그때는 몰랐습니다.

    5막 — 문

    관리하는 방법을 찾아봤지만 뚜렷한 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혼자 무모한 일을 벌이는 것 같아 마음이 식어갈 무렵이었습니다.

    실마리는 오래된 데서 나왔습니다. 애플워치를 사게 만들었던 그 기사입니다. 거기에 바이오해킹이라는 분야가 있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때는 시계만 사고 덮었는데, 이번에는 그 단어를 따라갔습니다.

    The Economist 표지. "The quantified self — How data can help you live longer"
    이미지 출처: The Economist, 2022년 5월 7–13일자

    브라이언 존슨의 Don’t Die 행사를 다녀왔습니다. 그가 자기 몸에 하는 일에 다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 행사에서 배운 게 많았습니다. 개인이 자기 건강을 관리한다는 게 뭔지 거기서 처음 봤습니다. 전문가들을 만났고, 그들을 통해 또 다른 전문가와 자료로 이어졌습니다.

    이후 바이오해킹 행사를 더 다니고 책을 읽으며 체계를 잡아갔습니다. 그런데도 뭔가 놓치고 있다는 아쉬움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늘 목말랐습니다.

    결국 하버드 의대 과정에 등록했습니다. 제 몸을 제가 관리하려면 배우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거기서 배운 것은 하나로 줄일 수 있습니다. 몸은 증상 하나씩 고치는 대상이 아니라 전체로 봐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전체를 실제로 다루는 틀이 따로 있다는 것.

    제가 왜 관리를 못 했는지가 그제야 설명됐습니다. 저는 결과지의 빨간 항목을 하나씩 따로 보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전체와 연결되어 있고, 따라서 원리를 이해해야 그 하나를 관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준비하는 데 2년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석 달이 걸렸습니다. 제 몸을 다시 돌리는 시간이. 지금 제 결과지에 빨간 항목은 0개입니다. 모두 제자리를 찾았습니다. 어떤 숫자가 어떻게 움직였는지는 프로토콜 문서에 따로 적겠습니다.

    6막 — 그래서 이렇게 씁니다

    하나씩 바꿉니다. 두 개를 같이 바꾸면 어느 쪽이 들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숫자로 확인합니다. 몸 상태에 대한 제 느낌은 그날 날씨에 따라 달라집니다.

    틀리면 접습니다. 효과가 있어도 제가 못 지킬 만큼 번거로우면 접습니다. 그 판단도 같이 적습니다.

    ChatGPT도 의사가 아니고 저도 의사가 아닙니다. 여기 적는 건 제 몸에서 나온 제 기록입니다. 따라 하시기 전에 의사와 상의하세요.

    매주 짧은 기록을 남기고, 실험이 하나 끝날 때마다 무엇을 바꿔서 무엇이 움직였는지 적겠습니다. 잘된 주보다 무너진 주를 더 자세히 쓰겠습니다. 저에게도 그쪽이 더 쓸모 있었습니다.

    저와 비슷하게 결과지에 빨간 항목이 늘고 있는 분들을 생각하며 씁니다. 제 몸에서 나온 기록이라 그대로 맞지는 않을 겁니다. 어디서부터 시작할지 정하는 데만 쓰셔도 충분합니다.

    그날 길에서 조깅하는 사람들을 보고 저는 웃었습니다. 지금 저는 그 사람들 중 하나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달리지 않고 걷습니다. 달리기는 저에게 무리였고, 측정해 보니 걷기가 저에게 맞았습니다.

    애플워치 울트라
    손목에서 몇 년째 재고만 있던 물건. 이미지 출처: Apple Newsroom

    2024년 1월 그날 밤, 저는 전화를 끊으며 「아직 당뇨는 아니다」라고 정리했습니다. 그건 안심한 사람의 문장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결과지를 한 번도 읽어본 적 없는 사람의 문장이었습니다.

    지금도 그 문장을 쓰고 계신 분이 있을 겁니다. 저는 십 년을 썼습니다. 서랍을 여는 데는 하루면 됩니다.

  • AI 키보드가 품절돼 생긴 일

    시작은 키보드였습니다

    Codex Micro 매크로패드. 아래쪽 가장 큰 키에 마이크 아이콘이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PCMag, “OpenAI Is Selling a $230 Keyboard Designed for Its Codex Agent”

    Codex Micro라는 키보드를 봤습니다. Work Louder와 OpenAI가 만든 230달러짜리 매크로패드인데, 키마다 색이 바뀌며 상태를 알려주고 — 파랑이면 생각 중, 초록이면 완료, 노랑이면 내 차례 — 아래쪽 가장 큰 자리에 마이크 키가 박혀 있었습니다. 사고 싶었습니다. 이미 품절이었습니다.

    못 사게 되니 오히려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나는 Claude Code를 쓸 때 무엇으로 지시를 내리고 있나. 세어보니 거의 전부 타이핑이었습니다. 그리고 지시가 길어질수록 느려졌습니다. 머릿속에 있는 걸 다 적기 전에 앞부분을 다듬고 있거나, 귀찮아서 짧게 줄이고 있었습니다.

    긴 지시에는 말이 더 맞겠다는 판단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저 키보드에 마이크 키가 있는 것도 우연은 아닐 겁니다.

    키보드는 못 샀으니 소프트웨어로 만들기로 했습니다.

    만들려던 것

    마이크에 대고 말하면 그대로 받아적어서, 지금 열려 있는 Claude Code 세션에 넣어주는 상주 스크립트입니다. “엔터”, “지워” 같은 예약어는 텍스트 대신 키 입력으로 처리합니다.

    받아적는 건 로컬에서 돌립니다. mlx-whisper의 large-v3-turbo를 쓰고, 그 앞에 faster-whisper의 VAD를 세워 무음 구간을 걸러냅니다. 조용한 구간을 whisper에 그냥 넘기면 하지도 않은 말을 지어내기 때문입니다.

    반대 방향도 붙였습니다. Claude의 대답은 macOS say로 읽어줍니다. 화면을 안 보고도 진행 상황을 알 수 있습니다.

    시작할 때 몰랐던 것

    상시 대기가 이렇게 어려운 줄 몰랐습니다.

    핫키를 누르고 말하는 방식으로 먼저 만들었습니다. 잘 돌아가니 욕심이 났습니다. 손도 안 대고 “클로드” 한마디로 깨어나면 더 좋지 않겠나. 시리도 하고 알렉사도 하는데.

    며칠, 어디까지

    하루입니다. 설계 문서를 커밋한 게 7월 24일 오후, 마지막 커밋이 25일 새벽 0시 50분. 그 사이 23개 커밋이었습니다.

    하루로 끝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전에 Vibe-Chat을 만들면서 STT와 TTS를 이미 한 번씩 공부해뒀습니다. whisper가 무음 구간에서 “감사합니다” 같은 하지도 않은 말을 지어낸다는 것도 그때 겪었고, 앞에 VAD를 세워 막아야 한다는 것도 그때 알았습니다. 이번엔 그 부분을 그대로 가져다 썼습니다. 처음부터 만든 게 아니라 절반은 재고에서 꺼낸 셈입니다.

    그리고 그날 밤 이걸로 실제로 일했습니다. 실행 로그가 201줄 남아 있습니다.

    21:23:44 ● 녹음중… (말이 끝나면 자동 종료)
    21:23:46 ⏳ 변환중…
    21:23:47 ✓ 키 입력: esc_esc
    21:23:47 ● 녹음중… (말이 끝나면 자동 종료)
    21:23:51 ⏳ 변환중…
    21:23:51 ✓ "응, 좋아졌지?" 주입됨

    되돌린 것

    웨이크 워드를 만들었고, 하루 만에 지웠습니다.

    fc6d1c3  feat: 웨이크 워드 '클로드' 상시 대기 모드
    9569f74  revert: 웨이크 워드 제거 — 핫키+VAD 자동 종료로 복귀

    이유는 정확도였습니다. “클로드”라고 불렀는데 안 깨어나거나, 부른 적 없는데 깨어났습니다. 둘 다 드물게 일어나는데, 드물게 일어나는 게 더 나빴습니다. 언제 틀릴지 모르니 매번 신경을 쓰게 됩니다. 편하려고 만든 기능이 신경 쓸 거리를 하나 더 늘린 셈이었습니다.

    핫키는 그런 게 없습니다. 누르면 듣고, 안 누르면 안 듣습니다. 여기에 무음 1.5초면 알아서 끊는 VAD를 붙이니, 결국 손이 가는 건 시작할 때 한 번뿐이었습니다. 웨이크 워드로 아끼려던 게 딱 그 한 번이었습니다.

    되돌리는 커밋을 쓰면서 든 생각은, 이걸 만들어보지 않았으면 몰랐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웨이크 워드가 어렵다는 얘기는 어디서든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드물게 틀리는 게 자주 틀리는 것보다 성가시다”는 건 읽어서는 안 와닿았습니다. 내가 만든 걸 내가 쓰다가 짜증이 나야 알게 되는 종류입니다.

    책상을 떠났습니다

    여기까지 와도 물리 버튼이 없었습니다. 노트북 키를 눌러야 하니 결국 책상 앞이어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처음에 못 산 그 키보드가 다시 떠올랐습니다.

    8BitDo Micro 블루투스 게임패드

    집에 8BitDo Micro가 있었습니다. 손가락만 한 블루투스 게임패드인데, 뒷면 스위치를 키보드 모드로 놓으면 별도 드라이버 없이 macOS에서 키보드로 잡힙니다. 값은 230달러의 10분의 1 정도입니다.

    여기서 한 번 걸렸습니다. 키보드 모드의 버튼은 원하는 키로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라, 버튼마다 정해진 문자키를 보냅니다. L 버튼은 k를 보냅니다. 푸시투토크 키로 쓰기엔 곤란합니다. 누를 때마다 화면에 k가 찍힐 테니까요.

    그래서 Karabiner-Elements를 한 겹 끼웠습니다. 패드가 보내는 kF13으로 바꿉니다. F13은 화면에 아무것도 안 찍히고 macOS 기본 기능도 없어서 푸시투토크에 안전합니다.

    여기서 꼭 필요한 게 기기 식별자 조건입니다. 이걸 빼면 변환이 진짜 키보드에까지 적용돼서, 타이핑하다 k를 누를 때마다 녹음이 시작됩니다.

    vendor_id: 11720, product_id: 36897

    나머지 버튼은 필요해서 걸었습니다. Claude Code는 말만 주고받다 끝나지 않습니다. 중간중간 선택지를 띄웁니다 — 이 편집을 허용할지, 어느 쪽으로 갈지. 방향키로 고르고 Enter로 정하고, 아니다 싶으면 ESC로 이전 메뉴로 돌아갑니다. 짧고 자주 오는 순간이라 말로 하기엔 오히려 번거롭습니다.

    그래서 D패드에 방향키, Y에 Enter, X에 ESC를 걸었습니다. 이제 한 손에 쥐고 대화를 끝까지 끌고 갈 수 있습니다.

    D패드에서 한 번 더 걸렸습니다. 패드를 세로로 쥐니 버튼 라벨과 실제 방향이 안 맞는데, 회전을 계산해서 맞추려다 틀렸습니다. 좌우가 뒤집힌 배치였습니다. 결국 EventViewer를 열고 네 방향을 하나씩 눌러 실측해서 넣었습니다.

    스크립트에서 바꾼 건 이 줄 하나입니다.

    HOTKEY = keyboard.Key.f13

    이제 AirPods를 끼고 게임패드를 쥔 채로 책상을 떠날 수 있습니다. 누르고, 말하고, 놓으면 됩니다.

    여기서 좀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못 사서 아쉬웠던 그 키보드는 애초에 이걸 못 합니다. 매크로패드는 책상에 놓여 있어야 하니까요. 대체품을 만들다 보니 원본이 못 하는 걸 하게 됐습니다.

    남은 것

    한국어 짧은 명령어는 여전히 자주 틀립니다. “지워”가 “주워”로 찍힙니다. 오인식 단어장과 자모 유사도 매칭을 붙여 급한 불은 껐지만, 근본적으로 해결한 건 아닙니다.

    그리고 오늘 이런 게 있었습니다. 녹음을 시작하자마자 “무음”으로 끝나버리는 일이 생겼습니다. 원인은 녹음 시작을 알리는 그 “띵” 소리였습니다. 스피커에서 난 소리가 마이크로 새어들어가고, VAD가 그걸 사람 말로 착각하고, 제가 입을 떼기도 전에 “말이 끝났다”고 판단해 녹음을 닫아버린 겁니다. 편하라고 붙인 소리 알림이 자기 귀를 막고 있었습니다.

    감시 시작 시점을 조금 뒤로 미뤄서 막아뒀지만, 헤드셋을 안 쓰면 언제든 다시 나올 수 있습니다.

  • AI가 써줄 수 있는 글은 쓰지 않습니다

    왜 지금 블로그인가

    검색을 AI가 대신하는 시대에 개인 블로그를 여는 건 늦은 일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늦었습니다. “이 에러는 이렇게 고칩니다” 같은 글은 이제 값이 없습니다. 물어보면 3초에 답이 나오니까요.

    그래서 그런 글은 쓰지 않기로 했습니다.

    안 쓸 글

    발행 버튼을 누르기 전에 저 자신에게 묻는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이 글을 AI가 30초에 쓸 수 있나?

    답이 “그렇다”면 올리지 않습니다. 검색해서 모은 걸 정리한 글, 읽은 책을 요약한 글, 뉴스에 감상을 붙인 글이 전부 여기 걸립니다. 저도 그런 글을 쓸 줄 압니다. 다만 그건 이미 다른 데 많습니다.

    쓸 글

    남는 건 하나입니다. 제가 직접 해보고 그 과정에서 실제로 겪은 것.

    AI가 못 만드는 지점이 그겁니다. AI에겐 흘러간 시간이 없고, 자기 몸이 없고, 틀렸다가 바뀐 생각이 없습니다.

    세 가지를 쓰려 합니다.

    AI — 제 일입니다. 매달 업데이트합니다. 그날그날의 유행을 따라가는 대신, 제가 일하면서 갖게 된 관점으로 보겠습니다. 관점이 글마다 바뀌면 그건 관점이 아니니, 같은 눈으로 계속 보는 쪽을 택합니다.

    건강 — 배운 것을 바탕으로 제 프로토콜을 만들어 매일 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를 숫자와 함께 그대로 적습니다. 잘된 주도 쓰고 무너진 주도 씁니다. 아마 무너진 주가 더 쓸모 있을 겁니다.

    주말 프로젝트 — 만든 것과 접은 것을 같이 적습니다. 접은 이유가 대개 더 유용하고 배울 게 많았습니다.

    약속할 수 있는 것

    매주 건강 기록을 남깁니다. 한 달에 한 번 AI 이야기를 씁니다. 뭔가 만들면 그때그때 적습니다.

    나이가 들어도 직접 배우기를 게을리하지 않으면 어디까지 가는지, 저를 상대로 실험해 보려 합니다. 그 기록이 여기 쌓일 겁니다.